제 19대 총선 단상

April 11th, 2012 No comments

타협하려는 자들은 이미지로 바뀔 것이다.
그들은 희미해질 것이다.
그들은 햇빛에 노출된 아침 식탁 위의 사진과 마찬가지여서, 사진처럼 갑자기 빛이 바랠 것이다.
점심 때는 그을리고 뒤틀린 사진처럼 될 것이다.
밤이슬이 내리고 다음날이 올 무렵에는 이미 갈라져 너덜너덜해진 사진처럼 되어 있을 것이다.

파스칼 키냐르 Pascal Quignard,『떠도는 그림자들 Les Ombres errantes』(문학과지성사, 2003, 송의경 옮김), pp.147~148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유령이 출몰하는 밤이다. 곧 다음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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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March 8th, 2012 No comments

분노 없이 살 수 없는 이 세상에
봄은 도둑고양이처럼

기형도, 「비가 – 좁은 門(문)」 中

1989년 3월 7일, 서울 종로 파고다극장에서 시인 기형도 죽다.
2012년 3월 7일, 제주 강정마을에서 몇 가지 소중한 가치들이 죽다.

이제는 그대가 모르는 이야기를 하지요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

기형도, 「내 인생의 中世」 中

우리의 딸들과 아들들은 모를, 너무 오래되어 어슴프레한 이야기가 생겨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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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말이예요, L양.

February 28th, 2012 No comments

헌 책방에 갈 일이 생겨서 모처럼 학교 근처에 갔다. 다른 대학가에 비해 화려하진 않았지만 나름의 정취가 있었던 학교 앞이 많이 변했다. 첫사랑에게 고백을 했던 커피숍은 할리스가 되었고, 친구놈들과 평생을 갈 것처럼 우정을 논하던 주막 또한 도시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의 간판을 달고 있다.

언젠가 친구에게 다음에 사라질 우리 동네의 가게가 무엇인지 예측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주인 아저씨의 아들이자 옆 반 아이의 이름을 딴 문방구들과 구멍가게들은 이제 모닝글로리나 링코, 세븐일레븐 또는 패밀리마트 등의 세련된 영어간판을 달고 있다. 제빵사 아저씨의 이름을 딴 많은 빵집들이 모두 파리바게뜨로 바뀌었다. 예쁜 누나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이름으로 시작하는 분식집들이 갑자기 국가대표가 되어버렸고, 무엇보다 원 이후 가장 거대한 제국 김밥천국이 골목을 지배하고 있다. 주택 이백만호 시대를 맞이하여 프랜차이즈 커피숍도 곧 이백만 매장을 열 기세다. 나는 다음 차례가 동네 반찬집들의 프랜차이즈화라고 생각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추억들은 동등하게 소중하다. 하지만 너와 나의 추억은 각별히 소중해야 한다. 우리의 추억이 각별히 소중하다는 비민주성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 비민주적인 각별한 추억들이 퇴적되어 마음의 지층을 만든다. 그렇게 다져진 우리 마음의 지층들 위에 흔해빠진 상표들이 쌓이는 것이 영 마뜩잖다. 젊은이들로 북적한 스타벅스에서 처음 만난 연인들의 사랑도 동등하게 소중하겠지만, 빈 자리가 종종 있던 식당에서 처음 만난 우리의 사랑이 각별히 소중했으면 좋겠다. 자본의 시대이다 보니 우리가 다질 마음의 지층에도 흔해빠진 상표들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쌓이겠지만, 민주주의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릴없이 비민주적인 사람으로 변할 것이다. 헌 책방 앞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말이예요, L양. 이 글을 보신다면 저의 전화를 받아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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