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학사주점, 장비샷의 추억
어제 naomi가 “막걸리와 소주를 섞어 마시면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을 제기했을 때, 문득 ‘소막’에 얽힌 2000년 어느 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우리 과에는 몇 개의 소모임이 있었고, 나도 다수의 소모임에 가입해 있었다. 그 중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대학문화탐방단 All for One”이란 조직으로 과 공동체의 문화에 끼치는 악역향으로 말미암아 과 학생회장 형의 숙청 1순위였다. 나는 당시 담배연기만 맡아도 기침을 하고, 소주 한 잔만 마시면 첫사랑에게 고백하는 소년의 얼굴색깔과 같이 홍조를 띠는 순수한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이 무서운 조직의 회원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러나, 내 인생에 호환·마마·전쟁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닥쳤으니, 이 소모임에 객원멤버로 참석하게 된 것이다. 내가 훗날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음주문화에 있어 내 인생에 한 획을 그은 경험으로 기록할 것이다. D의 작은 한 걸음이 nomen nescio에게는 커다란 도약(a great leap)가 되었으니까.
90년대에 리메이크 된 삼총사에 등장하는 모토 “All for one and one for all.”에서 이름을 딴 이 소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수도권의 다양한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문화탐방을 하는 소모임이었다. 물론, 나의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은 모두들 충분히 지각이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대학문화탐방’ 따위의 단어에 너무 심각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으시리라 믿는다. 벌써 시간이 흘러 강산이 한 번 바뀌었기 때문에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우리 학교 앞에서 발족한 ‘올 포 원’은 두 번째 모임부터 본격적으로 타 대학의 문화를 탐방하러 무려 4개의 대학교가 몰려 있는 신촌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다. (모임의 성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전원 남성인) 회원들의 치열한 논쟁(?) 끝에 만장일치로 이화여대를 신촌 지역의 대학문화 지표대학으로 선정하고, 이대생들과의 즉석 조인트 술자리를 꿈꾸며 과감히 이대 앞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연대 앞 껍데기 집에서 파할 즈음에야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커다란 교훈을 얻게 된다. 이어 인하공전 항공운항과 학우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떠났던 2차 인하대 대학문화 원정에서는 밤새 저 유명한 인하대 300다이에서 죽빵만 치다가 돌아오게 된다. 이어 성신여대를 노리고 갔지만, 제기시장에서 최후를 맞이한 3차 고려대 탐방을 마지막으로 이들은 조직의 내실을 다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객원멤버를 받게 되니, 그게 바로 나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한양대 비버리힐즈에 도착한 우리는 ‘비버리힐즈’와는 고양이와 쥐, 쥐와 국민만큼이나 거리가 멀어보이는 강력한 포스의 이름을 발견한다. 간판에 아무 수식어도 없이 궁서체로 ‘학사주점’이란 단어만을 적어놓은 주점을 보자마자, 우리는 “이 곳이 오늘 뼈를 묻어야 할 곳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어두운 지하세계로 들어갔다. 포스에 부응하듯, 그곳에는 양질의 막걸리와 강력한 내공의 파전이 있었다. 그리고 대학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모도 아닌 멋진 주인 누나가 있었다. ‘올 포 원’의 철칙은 매번 호스트를 정해 놓고 호스트가 밤새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쏘며, 호스트가 “All for one!”을 외치면 나머지가 “One for all!”을 외치면서 첫 잔을 원샷하는 것이었다. 이 날의 ‘The One’이었던 D는 “All for one!”을 외칠 때부터 왜인지 흥분하여, 계속 나머지 멤버들에게 술을 종용했다. 광란과 짜증이 혼합된 분위기에서 D가 다시 무리하게 술을 먹이려고 하자 우리는 역공격을 시작했다. 그의 주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꾸 남을 먹이려고 한다는 내용으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러자,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사는 폼생폼사 D선생께서 돌연 먹다 남은 막걸리 약 2/3사발에 소주 한 병을 콸콸 들으부으며, 갑자기 삼국지의 사수관 전투에서 관운장이 했던 말을 패러디했다.
“이 소주가 막걸리와 섞이기 전에 사발을 비우겠소.”
아! 책으로 읽었던 제갈공명의 출사표와 어렸을 때 본 백기완 선생의 출마선언을 제외하면, 그것이 내가 경험한 가장 멋진 출사표였다. 관운장도 멋있지만 역시 사발하면 장비인다가, D의 기개가 홀홀단신 장판교에서 조조군과 싸우며 대갈일성만으로 하후걸을 낙마하여 죽게 했던 장비의 기세와 거의 흡사했기 때문, 우리는 Michael Jordan이 고유명사화시켰던 ‘The Shot‘을 다시 보통명사의 지위로 끌어내려 우리 과의 역사에 The Shot으로 기록하기로 하고 ‘장비샷’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D는 정말 막걸리와 소주가 채 섞일 시간도 없이 사발을 비웠고, 약 5분이 지난 뒤 자신의 속도 모두 비웠다. 이틀 뒤엔 이날의 모든 기억조차 비웠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학사주점 이후 새벽 6시까지 우리가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면서 술을 마시는 동안, D는 계속 ‘운반’되었다. 도저히 일어나지 않아, 새벽 6시쯤 택시에 태우고, 과 주소록에서 D가 포함된 페이지를 찢어 기사님께 드리면서 잘 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한양대 슬럼 쪽에 있는 감자탕 집에서 해장을 하고 들어와 피곤한 몸을 뉘였다. 집에 들어오지 않은 D를 찾던 어머니와 통화한 바어디까지나 소문에 따르면… D는 집 근처 압구정동 가로등 밑에서 셔츠 단추를 풀어재낀 채, 압구정의 오렌지족 여성들을 유혹하면서 자다가 그날 밤에야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제의 술 ‘소막’은 우리 과에서 ‘오나집(오빠, 나 집에 안 가.)’, ‘교나강(교수님, 나 강의 안 들어가.)’등으로 불리며, 선생님들이 학점을 왜 이리 낮게 줬냐며 따지는 학생들을 응징할 때 또는 선배의 횡포가 극에 달했을 때 후배들을 숙청하는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견우·직녀와 콩쥐팥쥐와 같은 민담이 할머니의 할머니에서 할머니에게로 할머니에게 어머니에게로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처럼, ‘장비샷’의 전설도 선배의 선배에게서 선배에게로 선배에게서 후배에게로 전해져 젊다고 무작정 마시다가는 인생 종친다는 교훈을 아직까지도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제서야 나는 naomi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2~3년전 과 후배의 결혼식에서 D를 처음 만난, 우리가 학교를 다녔을 때와 시기가 거의 겹치지 않는 후배님께서 “혹시 선배가 그 유명한 ‘장비’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D의 표정을 상상해보라는 것이 나의 답이다. 실제로 그 표정을 본 우리는 죽을 때까지 ‘소막’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