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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존여비

September 24th, 2010 2 comments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돌아왔다. 작년에 시집 간 여동생은 당연히 시댁에 내려갔다가 추석 다음날에 제부와 함께 우리집으로 왔다. 사위 어지간히 챙기시는 어머니께서 정성스레 차린 추석상에 올라온 진미를 배불리 먹고 마루에 모여 앉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남존여비’에 대해서 한 마디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내가 꼬꼬마였을 때부터 우리 집이 얼마나 양반 집안인지 계속 강조하셨다. 요즘에는 국사가 필수과목에서 제외되었기에 모르는 애들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내 블로그 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노땅일테니 아실 것이라 믿는다. 국사를 배웠으면 조선 전기에 양반은 전체 백성의 5%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솔직히 양반아닌 집이 어디 있나? 그래서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우리 종가와 그 재산이 보물, 사적, 지방문화재 등등으로 많이 지정되어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물증을 나에게 보여주시며 우리 가문의 전통과 명예에 대해서 말씀하시곤 했었다. 마침 그 종가가 추석 당일 국회방송에 나와서 나는 내 방에서 마루로 소환되어 할머니와 아버지 앞에서 또다시 그 지리멸렬한 우리 집안 얘기를 들어야 했기에, 아버지가 ‘남존여비’ 얘기를 꺼내셨을 때 뭔가 불안했다. 그 이야기의 청자는 당연히 제부일 것이므로. 그리고 그로 인해 조금 불행해질 것은 내 친동생일 것이므로. 새삼스러운 건 없지만, 얘기를 듣고 조금 슬퍼질 것 같았다.

아버지께선 먼저 나와 제부에게 ‘남존여비’라는 단어를 아느냐고 물으셨다. 당연히, 우린 안다고 했다. 그러자, 모든 것은 해석이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하시며,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요즘 상놈들이 하도 설쳐서 남존여비라는 단어가 무시당하고, 잊혀지는 데 이게 아주 중요한거야. 자네 집안도 좋은 집안이지만, 우리같은 메이커있는 양반 집안에 왔으니 알아둬야 돼. 새겨들어. 사실 남존여비란 단어는 관혼상제 중 혼례를 치뤘느냐에 따라 구분되는 용어야. 혼례를 치르지 않은 이 놈(나) 같은 경우에는 “남자의 존재이유는 여자의 비용을 대는 것이다.“라는 뜻이고, 혼례를 치른 자네같은 경우는 “남자의 존재이유는 여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다.“라는 뜻이네. 알겠나. 비위 잘 맞추고, 특히 설이나 한가위같은 명절에는 더더욱 비위를 잘 맞춰야 되네. 명심해.

어머니와 여동생은 긴장한 상태로 듣다가 피식 웃었고, 제부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예상대로(?) 슬퍼졌다. 그리고,

어차피 비용을 댈 바엔 차라리 비위를 맞추자며 결혼을 결심했다.

Episodes

March 25th, 2010 No comments

3월 19일, 금요일인데다가 친구녀석의 여자친구의 생일이 얼마 전이었는지라 저녁을 함께 먹었다. 그 자리에는 예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친구 여자친구의 친구도 함께 했다. 사당역의 고깃집(여기 대박 맛집인데 나중에 한 번 포스팅할 예정)에서 고기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영 어색한 거다. 친구랑 여자친구랑 같은 쪽에 앉아서, 그녀가 내 옆쪽에 앉았거든. 그래서 접대용 멘트를 날렸다. “오늘 눈화장 잘 먹었네요. 예뻐요.”했더니 심통난 얼굴로 “저 오늘 화장 안 했어요!”라고 한다. 알고보니,
다크서클이었다.

3월 21일에 으레 그렇듯이 물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내가 가는 병원에는 물리치료사가 세 명이 있는데, 그 중 경상도 사투리(아마도 경상북도)를 쓰는 아주 귀여운 간호사가 있다. 이날은 이 귀여운 간호사가 내 담당이었다. 초음파 치료를 받고 있는데, 그날따라 나한테 말을 계속 거는거다. 나도 뭔가 한 마디 해야할 것 같았는데, 마침 머리카락이 살짝 젖어있길래 “날은 살짝 추운데, 더우신가봐요. 저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사해요.”라고 접대용 멘트를 날렸다. 그녀는 “땀 아닌데요… (공백) 기름이예요.” 알고보니,
지성피부였다.

난 아직도 이 일련의 사건들이 내 잘못인지, 그녀들의 잘못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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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데이

May 16th, 2009 4 comments

세상에는 별의별 ‘데이’가 다 있다.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야 워낙 유명-사실 어느 날이 남성이 여성에게 선물을 주는 날인지 알게된 것도 최근의 일이지만-하지만, 세상에 로즈데이까지 있을 줄이야. 유난히 길가는데 꽃을 든 사람들이 많길래 스승의 날을 앞두고 스승을 사랑하는 마음에 꽃을 들고 다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다 동창이 아니고 연인이었던거다…

내가 교제중인 여성은 뭐라고 할까 아주 예쁘지는 않은데, 하도 표정이 밝아서 실제보다 조금 더 예뻐보이는 그런 여성이다. 성격은 시크한듯 무심하기 이를데 없어서, 둘 중 한 명이 바쁘면 당연히 안 만난다고 생각하고, 본인이 졸리면 주말에도 날 안 만나고 그냥 잔다. 나는 다시 내가 이성교제를 한다면 반드시 상대방과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곤 했는데, 이 여성은 시크한듯 무심하지만 일단 만나면 한없이 착해지는 관계로 항상 내 의사에 의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으니 아직까진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내가 궁지에 몰린 사건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바로 로즈데이. 두둥!

어젯밤, 회사 근처에서 친한 입사동기 두 명과 열심히 술을 마시다가 굿나잇 전화를 했다. 갑자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묻는 것이다. 순간 비상벨이 울리는 듯한 환각을 경험하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우리가 교제를 시작하게 된 것이 화이트데이니까, 나는 대답했다. “우리 사귄지 두 달? 그거 아님 잘 모르겠는데…” 이내 실망한 애인의 한 마디. “로즈데이 몰라요?” 정말이지 나는 목요일은 로즈데이가 아니라 웬즈데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가 아는 웬즈데이는 프라이데이를 물리치고 최근 음주데이의 최고봉을 달리고 있는 날이다. 그래서, 난 동기들과 술을 마셨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의견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기각되었고, 어떻게 장미꽃 한 송이 줄 생각도 안 하고 동기들과 술을 마시고 있냐는 힐난이 이어졌다. 일단은 잘 무마하고 끊었다.

우리의 데이트 약속은 웬즈데이로즈데이가 아니라 프라이데이였다. 바로 오늘! 생일선물로는 줘 봤어도 생화를 이성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준 적은 내 인생에서 아직까지 한 번도 없는데, 장미꽃을 살 생각을 하니 약간 우울해졌다. 애인에게 그깟 꽃다발 하나 주는 게 어려워서는 아니다. 예로부터 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았던가. 열흘 동안 붉은 꽃이 없듯이, 아무리 성한 것이라 할 지라도 이내 쇠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연애 또한 마찬가지일 수 있는데, 꽃을 선물로 주는 것이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백화점에 들러 장미차를 사서 포장을 했다. 다음 주에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숙취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에 함께 가자고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1집 보편적인 노래 앨범을 샀다.

두 개의 선물을 받아든 그녀는 무척 좋아했고, 웬즈데이 아니 로즈데이에 있었던 내 연애 첫 위기는 무사히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샤브샤브를 먹고 인사동 스캔들을 봤고, 영화는 애인과 함께 보기에는 적당히 좋았다. 코엑스를 나오자마자 그녀는 마을버스가 왔다며 황급히 뛰어갔고, 나는 주말 잘 보내라고 인사를 했다. 이번 주말에도 그녀는 잠을 자고 싶겠지만, 귀하신 몸을 이끌고 일요일에 나를 만나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 주 금요일에는 나와 함께 브로콜리 너마저의 공연에 가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오지만, 귀가길은 간만에 편안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로즈데이가 야기했던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들을 겪게 될테고, 급기야 서로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는 일도 생길 것이다. 하지만, 왠지 잘 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2009년의 봄은 오늘부터 시작되었다.